멘탈과 퍼포먼스의 관계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 밖에 안 된다.

드라마 [미생]

드라마 [미생]의 명대사 중 하나. 소셜 미디어에 자주 공유되는 말인 만큼, 널리 공감을 얻은 듯 하고, 나 또한 고개를 끄덕였던 말이다.

이번에 넷플릭스에서 [플레이북: 게임의 법칙]을 보고 나니, 위 문장에서 ‘정신력’과 ‘체력’의 자리를 맞바꿔도 여전히 좋은 말이겠다고 생각했다.

파트리크 무라토글루(Patrick Mouratoglou). 낯선 이름이지만, 세리나 윌리엄스의 코치라고 하면 알 것 같은 사람이다. 2018년 US오픈 결승에서 있었던 사이 유명하다.

(c) USA Today

그가 말하길, 어떤 선수들은 ‘일부러’ 실수를 해서 경기에 진다고 한다.

‘고의적인 실수’라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고의’이면 더는 ‘실수’가 아니다.) 제3자가 보기엔 ‘실수’ 같지만, 선수를 오래 봐 온 코치의 눈에는 결코 실수로 보이지 않는 플레이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선수들은 승패가 결정되기도 전에 일부러 실수를 해서 경기를 빠르게 끝낸다고 한다. 특히, 평소 ‘재능’이 있다고 칭찬 받는 선수들에서 더욱 그런 경향이 짙다는 것이다.

이 코치의 설명은 이렇다: 그 선수들은 질때 지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의심받고 싶어하진 않는다. 재능이 없어서 진 게 아니고 최선을 다하면 이길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진 거라는 평가를 차라리 달가워한다.

선수 본인을 제외한 모든 스태프가 그 선수의 성공을 바라며 노력하는데, 정작 선수 본인이 실제 경기에서 노력은 커녕 일찌감치 패배를 재촉하는 플레이를 하다니. 역시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다.

다행히 나 역시 그 복잡한 인간이라, 위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진 않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가 코치라면, 어떻게 이 선수들이 자신의 100%를 다하는 방향으로 코칭할 수 있을까. 코치는 이 질문을 파고든다.

정신력, 즉 멘탈(mental)이 체력을 넘어설 수는 없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멘탈의 도움 없이 우리는 가진 체력을 100% 끌어내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잠재력을 폭발시키지 못한다.

결국 우리의 한계란 대부분 정신적인 한계다(이 코치가 한 말이다).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정신력이 구호에 불과하다면,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체력은 연료는 있지만 점화는 어려운 상황과 같다.

[플레이북: 게임의 법칙]은 세계적인 스포츠 코치들이 경기-삶에서의 규칙을 자신의 코칭 경험과 곁들여 설명하는 다큐멘터리. 손흥민 선수의 소속팀 감독 조제 모리뉴도 하나의 에피소드를 맡고 있다. 에피소드당 35분 정도로 짧아서 보기에 부담이 적다.

데런 브라운: 푸시

넷플릭스에서 ⟨데런 브라운: 푸시⟩ (Derren Brown: The Push, 2018)를 봤다. 일종의 사회심리학 실험 영상 같은 건데, 편집 덕분인지 스릴러 무비 느낌이 난다.

사회(집단) 속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사회(집단)의 기준과 주변에 어느 정도 자신을 맞춰 가며 살아간다. 적응하고(adapt), 순응(동조)하며(conform) 살아간다. 가볍게는 친구 따라 강남을 가고, 하고 많은 메뉴 중에 짜장면으로 통일을 하고, 너도나도 롱패딩을 입고.

그렇다면, 범죄는 어떨까?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집단 압력에 굴복해 범죄까지 저지르지는 않을 것 같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물며 경범죄가 아니라 살인 같은 중범죄라면? 더더욱 그러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데런 브라운: 푸시⟩ (Derren Brown: The Push, 2018)

정말로 그럴까? 데런 브라운은 이 쇼(?)를 위해 사회적 순응도가 높은 일반인 참가자를 선발한다. 남의 눈치를 조금 보기는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정교하게 셋팅된 연속적 상황과 숙달된 연기자들의 압력은 이 참가자로 하여금 옥상 난간에 앉은 누군가를 밀어서(푸시) 추락사 시키는 행위까지 나아가도록 계속해서 몰아붙인다(푸시). 과연 이 참가자는 사회적 압력에 굴복해 살인을 저지르게 될 것인가.

이 참가자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넣어보면 그 결과는 어떨까. 이 상황에서 “아니!”(No!)라고 되받아칠 수 있을까(푸시 백). 나 혼자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치, 조직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낙인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내가 속한 집단에는 이러한 종류의 순응(동조)가 있지는 않을까.

이런 물음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누구에게도 절대라는 상황은 없다는 것. 이게 이 실험 영상을 보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했고 등골이 서늘했던 이유이다. — 여러분은 다를 것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