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조카 태어났다

2012년 9월 모일 6시 51분, 나는 외삼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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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나도 조카 바보의 대열에 합류한다.

첫 조카의 태명은 ‘바른이’였다. 누나와 자형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바르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지만 중요하다”는 생각에 태명을 ‘바른이’로 정했다고 한다.

또 한 명의 가족이 생겼다. 느낌이 묘하다.

새 사람의 새 삶, 새 역사가 지금 막 시작했다. 조카가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 더 아름답길 희망한다.

오늘은 정말 아버지가 보고 싶다

집에서 보내주시는 택배는 남다르다. 일단 포장부터가 겹겹이다. 집에 있는 테이프는 다 갖다 쓰시는지 이리 붙이고 저리 붙이고 빈틈없는 아버지의 성격이 그대로 봉해져서 내게로 온다. 그래서 보통 택배보다 여는데 시간도 더 걸리고 힘도 들지만 바보같은 나는 여기서 또 아버지의 사랑과 고집을 느끼고, 어서 빨리 부모님을 뵙고 싶어진다.

아버지가 헤쳐와야했던 세월의 무게를 안다. 수차 편지로 고백했지만 그런 말로는 다 아우를 수 없는 그런 세월들, 그 세월을 아버지는 단기필마로 돌파하셨다. 그리고 여전히 꿈을 꾸신다. 아들인 나로선 아버지께서 허황되나마 그 꿈을 잃지 않길 바란다. 아이처럼 신나서 꿈 얘기를 하시는 아버지를 뵙노라면 나는 차암 기쁘고 감격스럽다.

통화료가 많이 나오니 용건만 간단히! 하라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긴 묵상을 한다. 아버지의 검소함과 냉정함에 대하여. 그런 아버지도 때론 아주 옹졸해지실 때가 있는데, 나는 어쩜 그 애비에 그 자식으로 그런 것까지 닮아 때로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오늘은 정말 아버지가 보고싶다. 아버지 꿈 얘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고 싶다. 아버지와 온탕에 들어앉아 으아 으아 으아 거리며 부자지정을 느끼고 싶다. 딱 한 잔 반주에 아쉬워 어머니 눈치를 보며 입맛을 쩌업 쩝 다시는 아버지 옆에서 오늘은 아들도 오고 했으니 딱 한 잔만 더 하시라고 못 이기는 척 술잔을 채워드리고 싶다.

어머니와 함께 10분 글쓰기 했다

어머니와 10분 글쓰기를 했다.

10분 글쓰기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쓰며 사는 삶⟫에 나오는 방법이다.

10분 동안 정신없이 쓰고 잠시 쉬다가 다시 10분 동안 정신없이 쓰면 된다.

어머니는 처음에 자신없어 하셨지만, 일단 시작하니 10분 정도는 끄덕없이 쓰셨다.

어머니랑 나는 고작 두 페이지 정도 써놓고는 같이 울었다. 오늘은 이 정도로 그치기로 했다.

누나가 결혼했다

지난 일요일. 갑작스런 추위가 잠시 숨을 고르던 그 날. 누나가 결혼했다.

누나가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우스웠고, 갑자기 속상했다가 점점 걱정이 됐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누나의 결혼’이라니. 연지곤지 찍고 소달구지 타고 읍내로 영영 가버리는 그림이 떠오르지만 사실은 바로 옆 동네로 이사했을 뿐이다. 게다가 누나와 나는 고등학교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외하며 살았다. 그래서 아직은 누나의 결혼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어릴 적에는 다투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 고작 한 살 차이라 우리 둘은 키도 고만하고 지식도 고만하고 생김도 고만한데, 부모는 항상 “누나 먼저”를 강조했고, “누나한테 잘 좀 하라”고 나를 다그쳤다. 어린 나는 그게 그렇게도 억울했다.

내가 보기엔 칭찬을 받아도 내가 더 받을 게 많고, 귀여움을 받아도 애교가 많은 내가 더 받아야 마땅한데, 왜, 어째서, 부모는 누나를 먼저 챙기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아마도 누나를 ‘부모님의 애정’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경쟁상대 쯤으로 여겼나보다. 맞서 싸워야 할.

거기다 주변에 온통 여자 형제에 여자 꼬마아이들 뿐이어서, 나는 어떻게든 그 무리에 끼고자 누나를 걸고 넘어졌고, 때로는 누르려고 발버둥을 쳤던 것 같다. 말하자면, 누나는 ‘기성 체제의 일부’였고, 나는 ‘현상 타파’를 원했던 셈이다. 이외에도 내가 ‘애정결핍’이었음을 입증하는 사실의 파편은 곳곳에 있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또한, 그런 남동생의 존재 때문에 누나가 감당해야 했던 불편과 고달픔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할 만큼 무심한 아이였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누나가 누나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들에 대해서는. 누나는 내가 태어나는 바람에 모유를 충분히 먹지 못했다. 독차지 하던 부모의 애정도 나누어야 했다. 하필이면 동생이 무엇 달린 ‘사내’인지라 그 비애는 더 컸으리라.

부모로부터 전해들은 말이긴 하지만, 누나는 미련하게도 그런 남동생을 어려서부터 아끼고 사랑했단다. 내가 누워만 지내던 갓난아기 시절에는 가만히 기어와서 지켜보고, 보행기를 타고 다니던 시절에는 보행기를 밀어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몇 년 후에 시작될 ‘남매전쟁’에 대해서는 전혀 예상치도 못한 채, 마냥 좋아서는.

사춘기를 거쳐 관심사도 활동 반경도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지면서 누나와 나는 서로 다른 세계의 일원이 됐고, 그 때문에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이 지금까지 지냈다. 열전은 흐지부지 종결됐고 긴 평화가 이어졌다. 간간이 정상회담을 하긴 했으나 관계의 진전 같은 건 없었고 어느덧 ‘서로 예의를 차리는 사이’가 됐다. 서로 싸울 일도, 싸울 정도의 애정도 없다. 나이가 먹으며 자연히 이렇게 됐다.

이제는 고향에 내려가도 아주 당연히 누나를 보는 건 불가능하리라. 그러니까 집에 도착해서 짐 따위는 던져놓고 아이스크림이나 떠먹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노라면, 밤 늦게 “동생 왔어?”하며 현관에 들어설 누나를 기대하기란 어려울 거란 얘기다. 책과 잡지, 옷가지, 신발, 작업물 등이 뒤섞여 온통 어지럽던 누나의 방도, 없다.

누나가 결혼했다.

어제는 어머니 생신이었다

어제는 어머니 생신 날이었다.

분명히 스케줄러에 적어놓았는데, 새벽에 귀가해서 오후께나 잠에서 깬 덕에 종일 정신이 없었다. 희망청도 빠듯하게 도착했고, 미팅 끝나자마자 인터뷰 도우러 연대 동문 쪽에 왔다가 진곤형 만나러 다시 이대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다시 신촌.

그러다가 어머니 전활 받았다. “아들, 오늘 엄마 생일인 거 알고 있었어?”

아뿔싸. 지금껏 해드린 것도 없고, 해드릴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오늘은 꼭 먼저 전화해서 축하하고 싶었는데. 부끄러운 마음으로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하고 사랑한다고, 생신 축하한다고. 앞으론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답하겠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께서, “아들 너 잘하고 있어. 엄마는 우리 가족 행복하면 축복이란다. 아들 축하받으니 정말 기뻐. 잘자.”라고 답해주셨다.

어무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시오.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고향집 다녀왔다

할아버지 제사 때문에 고향집에 다녀왔다. 제사라고 해도 고인에 대한 기억을 갖고 모인다기 보다는 이렇게라도 모이지 않으면 가족들이 모일 일이 별로 없으니 그냥 뛰어넘기는 뭣하고 해서 지내는 것 같다.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여전히 ‘생고생’은 여자들이 도맡는다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는 제사가 간소화되는 추세라서 일이 줄었다. 다행이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만나면 반갑고 즐거운 일만 가득할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 역시 졸업 학기와 군대를 남겨놓은, 집안의 철없는 대표주자로서 쓴소리 많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제사를 핑계로 이렇게 많은 가족들이 한 군데 모인 것이 참으로 행복했다. 서울 생활이 길어지면서 오랜 정이 쌓인 관계, 피붙이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 것 같다.

인천에 살고 있는 중학생 사촌을 위해 ⟪아로와 완전한 세계⟫를 가져가서 선물했다. 예전과 달리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있으려 하고, 밥도 잘 먹지 않는 것이 걱정이 되지만 한참 예민할 나이임을 감안하니 그러려니 싶었다.

대구에 있는 중학생, 고등학생 남매 사촌을 위해서는 ⟪만화 박정희⟫와 ⟪만화 전두환⟫을 주었다. 비록 만화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숙부가 얘네들 만화 많이 읽는다고 구박을 주는 모양인데, 나는 만화도 충분히 교육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가족이 돌봄, 나눔, 배움이 있는 그런 관계로 거듭나길 바란다. 그래서 가족 카페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고, 가족 문집 같은 것도 만들어 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자연적으로 맺어진 관계라고 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가족이고 뭐고 귀찮고 성가신 그런 관계가 될 뿐이다.

정말 좋은 관계란 부담이 없는, 상대방이 흔쾌히 나눠가질 수 있을 정도의 적당한 부담을 갖는 그런 관계이다.

21살 생일 맞아 부모님께 드리는 글

존경하는 부모님께.

올해도 쏜살같이 달려 어느새 마지막 달이 되었습니다.

벌써 처음을 얘기했던 것과 같이 끝을 얘기할 때가 되었다니, 참 섭섭합니다.
하지만, 섭섭함과 함께 새로운 한 해에 대한 기대감이 그나마 헛헛한 마음을 달래주는 것 같습니다.

2006년 12월 9일 오늘로서 저, 아들 박세희는 만 21세가 되었습니다.

스무 해 가까이 살면서 큰 병치레 없이, 큰 사고 없이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부모님의 보살핌 덕분입니다.

부모님이 제게 주신 사랑을 생각하면, “어떻게 하면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까?” 혼자 고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 이 편지를 통해, 제 삶을 더욱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부모님께 약속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신의(信義)를 생명으로 알고 눈 앞의 사소한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둘째로, 어떠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자신감과 그에 부합하는 능력을 갖추어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재가 되겠습니다.

셋째로, 좋은 것이 있으면 주윗사람들과 함께 나눌 줄 아는 넉넉함과 인정을 가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넷째로, 초심(初心)을 잊지 않으며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겸양의 덕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다짐을 지키기 위해 밑바탕이 되는 수신(修身)을 몸소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부모님의 이름 앞에 부끄럽지 않은 아들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직접 찾아뵙고 안부를 전하지 못하는 불효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부모님께 무한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늘 지금처럼만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6년 12월 9일 서울에서,
21살 생일을 맞은 아들 올림.

방학 맞아 고향집 다녀왔다

집에는 많은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뜻한 마루 바닥과 어머니 특제 된장국, 칠리새우, 고령에서 갓 따온 신선한 딸기 한 소쿠리, 녹차 쉬폰 케익, 고량주(?)와 함께라 기분이 좋은 아버지.

누나는 영어와 한 판 승부를 준비하기 위해 아직도 학교에 틀어박혀 있다. 알고보니 영어 캠프 같은 것에 참가했다고. 오늘은 영어 연극 발표가 있어서 가족 외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영어는 차치하고 누나가 하는 연극은 정말 궁금하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전히 웃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친지들이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고 또 여전한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들이 다만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What for? 그런 질문은 이미 무의미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 던져졌으니까. 내게 다가왔던 많은 어려움, 이 어려움들을 풀어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온전히 나의 삶이 될 것이다.

이사한 고향집에서 사진첩 봤다

고향집이 이사를 했다.

이사 후 처음 가봤는데, 내 짐들은 대략 엉망진창이 되어있고, 나 역시 그걸 정리할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부모님께 시중에 파는 보관함 같은데 넣는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부쩍 넓어진 누나방에서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앨범과 누나의 사진첩을 열어보게 되었다. 아, 스캐너가 있었다면 몽땅 디지털화해서 두고두고 보고 싶던 사진이 얼마나 많던지!

특히 사진첩을 넘기면서 늘 울상인 통통한 누나의 옆에서 장난끼 가득한 얼굴로 아버지를 곧잘 흉내내던 나의 모습을 종종 찾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절대로 넉넉하지는 않은 집안(집구석)이었지만, 사진을 봤을 때는 남들 하는 것 다 해보고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딱히 가족여행을 많이 간 것도 아니지만 없는 살림에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새벽에 부모님의 사랑을 혼자 상상하곤 괜히 목이 매었다. 나도 꽤 애정을 받아가면서 자랐구나 싶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이메일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 간격으로 아버지에게서 메일이 온다. 항상 “사랑하는 아들아”로 시작해서 “건강한 아들이 되어라”로 끝나는 메일의 내용은 늘 긍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격려의 말도 잊지 않는다. “멀리 서울에서 공부하느라 힘들겠지만 인내하라”는 투의.

답장은 잘 쓰지 않는다. 쓸 말도 없고 “추운데 열심히 공부하느라 힘들지”라는 내용에 솔직히 답하려니 간지럽기도 하고 실망을 안겨드리자니 가슴 아프기도 하고.

난 어머니나 아버지를 생각하며 무언가를 해왔다. 나를 위해서라는 생각은 큰 힘을 얻지 못했고 지속력을 가지지 못했다. 장학금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좋은 성적으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뭐 이런 생각 뿐이었다. 왜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부모님 역시 스스로를 위해서 살지 않고 있다고 대답하겠다. 내리사랑은 원래 그런 것인가.

내 힘으로 부모의 굴레를 벗어나기 전까지, 나는 그런 동기로 살 수 밖에 없다. 부모의 말이라면 꿈뻑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할 것 같은 생각이다.

사랑의 방법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잊을만하면 전화하셔서 목소리 듣고 싶었다고, 올려주는 영양제는 잘 챙겨먹고 있나 묻는 것이고 집에 좀 더 오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말하는 것이며 남이 어떻게 되었든 내 아들만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는 마음이다.

내가 어머니를 사랑하는 방법은 어디서든지 어머니의 아들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제대로 챙겨먹지 않아도 꼬박꼬박 먹는다고 웃으며 거짓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남한테 뒤지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며 그 방법을 따르게 하기 위해서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는 것이다. 또 절대로 당신처럼은 살게하지 않기 위해 모자람없이 자라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방법은 아버지와 격렬해지더라도 끝까지 최대한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며 나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고 어디서든지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부족하더라도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