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 김 Google 디렉터의 “실리콘밸리의 일하는 문화” 특강 정리

김현유(Mickey Kim) Google 디렉터의 “실리콘밸리의 일하는 문화” 특강을 들었다. 드림플러스63 입주사 센트비(Sentbe)가 준비한 사내 행사(일명 Sentbe TED)였다.

특강 내용을 아래에 정리했다:

  • 미팅은 정해진 시간에, schedule-based work process
    • 팀 미팅, 1 on 1 미팅 모두 정해진 시간에 진행
    • 미팅 희망시, 빈 slot에 참가인원 invite 하여 arrange
    • 자료 준비 등 집중하고 싶은 시간대도 본인이 설정
    • 위 업무 일정은 팀원들 모두 스케쥴러로 공유 (google calendar)
    • 일정 예측 가능, 하고 있는 일에 최대한 집중할 수 있는 문화
    • 출퇴근 시간, 업무 장소의 유연화로 Work-Life Balance 달성됨
  • 성과평가는 Career Development에 도움이 되도록, 냉정하게
    • 분기마다 OKR(Objective & Key Result) 직접 작성
    • 2분기마다 주로 가까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평가 실시
    • 평가는 크게 3분야 “한 일, 잘 하고 있는 일, 더 잘 해야 할 일”
    • 실명 평가이고, 평가 작성에 시간을 많이 들임
    • 자기 직급(Lv.)을 넘어서는 성과를 내야만 승진이 가능
    • 성과평가 과정이 피평가자의 Career Development에 도움이 됨
  • Management Communication은 자주, 공개적으로
    • 회사 정책, 방향 설명하는 타운 홀 미팅을 자주 개최함
    • 타운 홀 미팅 전부터 내부 시스템으로 질문을 취합하고,
    • 인기 있는 질문일수록 상위로 올라가서 답변을 주는 시스템
    • 직원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하여 ownership을 갖게 됨
    • 불필요한 웅성거림을 줄이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줌
  • Q&A
    • Google은 검색 → Mobile First → AI First 추진 중
    • 업무에 있어서 over-communication은 매우 중요

열정에서 성숙으로

Y모 강사의 친족•상속법 강의를 들었는데, 강의 내용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그가 세바시 강연을 듣고 나서 해줬던 열정, 권태, 성숙에 관한 이야기. 찾아보니 김창옥 교수가 했던 강연이다.

강연의 요지는, 인간이 품은 ‘열정’은 짧든 길든 일정 시간이 흐르면 ‘권태’(또는 정체기)를 만나 사그라들게 되며, 권태가 ‘성숙’으로 고양될 것인지 아니면 ‘우울’로 빠져들 것인지는 미래에 대한 낙관을 가졌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그러니, 이 권태는 반드시 끝이 난다, 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견뎌낸다면 성숙에 이를 수 있다.

외계소년 위제트를 닮아 어딘가 친근한 알리바바의 마윈은 “오늘은 힘들고 내일은 더 힘들 수도 있지만 모레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일 저녁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모레의 빛나는 태양을 보지 못한다.”라는 곱씹을수록 묘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오늘 힘들지 않고서는, 오늘 하루만 힘든 정도로는 모레의 태양을 볼 수 없다는 아주 냉정하고 현실적인 조언이면서, 어쨌거나 고진감래의 낙관을 가지고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따뜻한 격려이기도 하다. 설령 모레까지 힘들면 내일 모레를 기대하면서…, 힘겨운 시간은 그렇게 버텨내는 것이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기

에릭 호퍼,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2005) 읽었다.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를 칭하는 표현 중 이보다 나은 것은 찾기 힘들다. 그는 거의 평생을 길 위에서 보냈다. 그가 여느 부랑자, 떠돌이 노동자와 다른 점은 틈나는 대로 글을 읽고 또 글을 썼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다.

에릭 호퍼는 ‘일’에서 보람을 찾는다는 건 온당치 않다고 했다. 일은 그저 일이다. 그는 퇴근 후에야 글을 읽었다. 그리고 노동은 사색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는 땀흘려 일하는 도중에 몇 가지 착상을 하기도 했다. 이른바, “머리를 아래로 하고, 엉덩이를 위로 하는 자세”의 사색이다.

에릭 호퍼,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2005)

어쩌면 80년대 운동권 학출들이 야학과 노조운동을 통해 꿈꿨던 ‘읽고 쓰는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노동자’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에릭 호퍼는 독재와 자본주의를 뒤집어 엎을 ‘혁명의 주체’는 아니다. 그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정복시킬 마음이 없다.

그가 돈에 대해 쓴 경구를 보자:

“Whoever originated the cliche that money is the root of all evil knew hardly anything about the nature of evil and very little about human beings.” (돈이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클리셰cliche를 만든 이들은 악의 본성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는 자들이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째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에릭 호퍼는 돈이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고 봤다. 돈만 있으면 출신이 비천한 이라도 떵떵거릴 수 있다. 화폐는 권력과 신분, 지위를 환원시킨다. 오히려, 돈은 자유의 동력인 것이다. 돈이 인간을 해방시켰다!

에릭 호퍼는 정주할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평생을 자진해서 떠돌았다. 이유는 길과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 그에게 사색의 소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길 위로 나서면 일자리는 어디에나 있었고, 일자리가 있는 곳에 잠자리와 먹을거리도 있었다. 책은 퇴근하고 공공도서관에서 읽었다.

그는 몽테뉴의 수상록을 암송할 정도로 즐겨읽었다는데, 이 책과의 인연이 재밌다. 여느 때와 같이 일자리를 구했는데, 일하는 도중 아주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함을 알게 됐다. 이 심심함을 달래려 근처 헌책방에 들어가 눈에 띄는 책 중 가장 두꺼운 책을 집었는데, 그게 바로 그 책이었다고 한다.

에릭 호퍼가 살았던 20세기 아메리카는 특수한 환경임에 분명하다. 하필 그가 캘리포니아에 살았던 이유를 보라. 그 동네에는 일손을 구하는 농장이 널렸다. 기후도 노숙에 적합하다. 21세기 한국은 어떨까? 대학 청소노동자의 생계임금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 사회이다.

밥벌이란 원래가 비루하다. 일은 생존을 위해 하는 것이지, 존엄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일에서 자존감을 얻을 수 없다면, 별개로 읽고 쓰는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 독창적 사상가가 되진 못할지언정,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에릭 호퍼는 좋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비폭력 대화

마셜 B. 로젠버그, ⟪비폭력 대화⟫ (2004) 읽었다.

아룬 간디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우리는 대개 우리의 폭력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이것은 우리가 폭력 그 자체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6쪽)라고 썼다.

비폭력 대화(Non-Violent Communication)의 존재는 ‘대화’도 폭력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비폭력 대화의 ‘비폭력’은 마하트마 간디가 사용한 그대로 “우리 마음 안에서 폭력이 가라앉고 자연스럽게 본성인 연민으로 돌아간 상태”(18쪽)를 뜻한다.

우리의 본성이 연민인가? 불가(佛家)에서는 적어도 그렇게 본다. 나와 남을 가여이 여기는 마음에서 자비심이 일어난다. 그래서 비폭력 대화를 연민의 대화(Compassionate Communication)이라고도 한다.

비폭력 대화의 목적은 4단계 모델(관찰-느낌-욕구-부탁)을 사용하여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살며, 타인과 보다 솔직하고 공감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 관찰은 사실과 평가를 분리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 단계, 느낌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느끼는 바를 표현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 욕구는 두 번째 단계에서 발견한 느낌을 자신의 욕구와 연결하는 법을 배운다. 이를 통해 우리 느낌의 원인은 타인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임을 이해한다. 타인의 말과 행동은 하나의 자극일 뿐이다.

마지막 단계, 우리의 욕구를 긍정적인 행동 언어를 통해 구체적으로 부탁하는 방법을 배운다.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비폭력 대화는 일종의 대화법, 대화기술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를 가르친다. 따라서 관찰-느낌-욕구-부탁으로 이루어진 4단계를 이해하는 일은 간단해보여도, 비폭력 대화를 일상에서 실천하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비폭력 대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감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감이란 “우리의 모든 관심을 상대방이 말하는 것 그 자체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고, 이해받았다고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는 것”(140쪽)이다.

상대방에게 공감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에게 공감해야 한다. 내가 나에게 공감하다니? 형식 논리상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이 습관적으로 자기 비하를 한다. 자신의 욕구를 배반하고 내외적인 강요에 의해 살아간다.

자신에게 공감하려면 우선 자기 내면의 욕구를 들여다보고 자신을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를 해야만 한다’를 ‘~를 원하기 때문에 ~를 선택한다’로 바꾸길 권한다.

마지막 단계인 ‘부탁’ 역시 쉽지가 않다.

앞의 세 단계(관찰-느낌-욕구)를 충실히 실행했다 하더라도, “특히 말하는 이가 권위 있는 위치에 있고, 상대방이 과거에 억압적인 권위자를 경험했다면”(126쪽) 부탁이 아니라 강요로 들릴 확률이 높다.

강요에는 “복종 아니면 반항”(122쪽)이라는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질 뿐이다. 우리의 부탁이 진심으로 부탁이 되기 위해서는 “부탁에 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을 공감하면서 들어”(124쪽)줄 필요가 있다.

비폭력 대화가 희망적인 부분은 어느 일방이 시도하더라도 쌍방이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내가 타인에게 부탁을 할 때도, 내가 타인의 비난/불평을 들을 때에도 사용할 수 있다.

단기간에 체화하기 힘든 경지이긴 하지만, 나와 내 주위의 삶을 풍요롭게 바꾸기 위해 시도할 가치는 충분하다.

벤자민 프랭클린, 견실한 실천가

벤자민 프랭클린, ⟪프랭클린 자서전⟫ (2009) 읽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삶에서 본받을 점이 있다면, 그는 허황된 이론가가 아닌 견실한 실천가였다는 사실이다. 좋은 아이디어를 생산해내고 퍼뜨리는 이들은 종종 있어왔다. 그러나 그는 그에 그치지 않고, 절제, 근면, 진실, 겸손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 해냈던 것이다.

특히 타인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는 것, 비밀모임을 통해 자기발전과 상호부조를 도모한 것, 공공사업 추진에 있어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은 것, 쓸데없는 논쟁은 가급적 피하려고 한 것이 주요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성정, 즉 지적교만으로 논쟁을 통해 남을 굴복시키려는 욕구를 긴 세월의 훈련을 통해 억누르고 좋은 습관을 가졌다는 점에서 훌륭하다. 자신이 지닌 것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더 나아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문화는 힘이 세다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2009) 읽었다.

이 책의 결론은, 성공한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조건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직관에 위배되지 않는다.

‘성공’이란 어디까지나 ‘사회적 성공’ ― 부, 명예, 권력 등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 ― 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회문화적 조건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적인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책의 제목처럼 Outliers는 ‘운’이라 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을 타고나야 가능하다. 저자는 이 ‘운’을 만날 기회를 주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몇 가지 재미있는 개념들이 나온다.

먼저, ‘누적적 이득’, 이는 ‘마태복음 효과’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1등을 해 본 사람이 계속 1등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1등과 2등이 큰 차이가 없더라도 1등에게 사회적으로 더 많은 자원과 지원이 모이게 된다.

다음으로, ‘실용 지능(practical intelligence)’. 이는 IQ 195의 천재 크리스 랭건과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교하면서 나오는 개념이다. 랭건은 목장에 살며 잡문들을 쓰면서 하루를 보내고, 오펜하이머는 누구나가 아는 물리학자가 됐다. 똑똑하기로는 둘 다 똑같이 똑똑했는데,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는가?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데 필요한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지능과 실용 지능은 독립적이다. 일반 지능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실용 지능은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지식이다.

랭건은 저학력·저소득층 가정에서 나고 자랐고, 오펜하이머는 문화적 교양이 풍부한 집안에서 자랐다. 상류층 집안의 자녀들이 ‘집중 양육’(concerted cultivation)을 받을 기회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이 집중 양육을 통해 아이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 성공에 더욱 유리한 ― 실용 지능을 익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권력 간격 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 PDI는 특정 문화가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나타낸다. 국가와 문화권마다 PDI는 차이를 보이며, 흥미롭게도 이를 항공기 추락사고와 연결지을 수 있다.

거대한 여객기를 조종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기장과 부기장의 적절하고도 조화로운 파트너쉽이다. 기장과 부기장은 엄연히 권력관계에 있지만, 때론 이를 넘어서는 조언을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윗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부드럽게 돌려 말하기’(즉, 완곡어법)가 일반적이다. 서구의 의사소통은 ‘화자 중심’인 반면, 동양의 의사소통은 대체로 ‘청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조종사들의 PDI를 측정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조종사들의 PDI는 높은 편이었으며 PDI 상위 5개국가와 항공기 추락사고 발생 빈도 상위 5개국가는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항공은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공용어를 영어로 바꾸었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행위인가? 이 조치를 단행했던 델타항공의 데이비드 그린버그는 오히려 이로써 “한국인이 스스로의 문화적 기원에 솔직해지”는 것으로 봤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데이비드 그린버그는 “문화적 유산의 힘은 강력하고 널리 퍼져 있으며 본래의 유용성이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일약한다: “문화를 무시하면 비행기가 추락한다.”

직업 정치가가 가져야 할 열정, 책임의식 그리고 균형감각

직업 정치가가 가져야 할 요건은 ‘비창조적 흥분 상태’와 구분되는 ‘객관적 태도’로서의 열정과 책임의식 그리고 이 둘을 가능케 할 균형감각이다.

직업 정치가라면 자신의 내적 기반 ― 즉, 신념 ― 에 의해 행동하되,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결과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베버가 강조하는 책임윤리이다.

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가진 신념만으로 정당하며 그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직업 정치가가 베버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속에 숨어있는 악마적 요소들에도 민감해야 한다.

베버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이 정당화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목적의 달성, 즉 자신이 실행한 바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란 마지막 순간에 개인적 소회를 통해서 드러나야만 가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념윤리가 없다면, 헌신과 열정은 생기지 않고 허무한 껍데기 속에서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고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상보관계에 있다. 가슴 깊은 곳에는 신념윤리를 간직하되, 행동에 있어서는 책임윤리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베버는 ‘나이든 이’로서 경고한다. “10년 뒤에 어디 두고봅시다. 내 강연을 듣는 이 중에 몇이나 여전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책임을 갖고 살고 있을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정치의 영역에 뛰어들기 보다는 평범한 시민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낫지 않겠냐는 뉘앙스다.

그럼에도, 자신이 정치에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두꺼운 널판지를 뚫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늘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현재로서 가능한 것조차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의 자세. 직업 정치가, 소명을 가진 정치가에게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해야만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현대 정당 발전 과정에 대한 베버의 사회학적 통찰도 빛난다. 특히 코커스(caucus), 전당대회와 같은 ‘기계’(machine)의 등장은 ‘대중적 독재자’의 출현을 초래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혼 없는 ‘명망가 정치’가 득세한다. 이 분석은 우리의 선택을 두 가지로 좁힌다. 현대 정당체제에서 정말로 주어진 선택지는 그 둘 뿐인가? 어쨌든 한국의 경우는 전자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또한 대체적으로 직업 정치가는 변호사나 저널리스트, 이익집단, 당 관료 등으로 시작하는 편이 좋다고도 덧붙인다.

변호사는 자신의 고용인을 위해 질 법한 일도 이길 수 있는 논증을 퍼부으며, 이길 수 있는 일은 더 잘 이기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직업 정치가의 중요한 자질인 연설 능력, 글쓰기 능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널리스트의 경우에는 글쓰기의 능력이라는 부분에서 주목 받으나 ‘글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고, 당 관료는 ‘정치꾼’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익단체 소속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현대로 올수록 저널리스트는 점점 정치에 의존해서 살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이익단체 활동을 통해 정치 영역에 입문하는 것은 바람직한 경로라 하겠다.

이 강연에서 베버는 정치, 정당 제도로서 외적인 요건이 가지는 특성과 직업 정치가의 내적 자질을 동시에 다룬다. 정치 제도적으로 영국은 의회 정치, 독일은 관료 정치, 미국은 대중적 독재로 분류하게 되더라도, 직업 정치가의 자질을 따질 때는 ‘윤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좋거나 싫거나 직업 정치가의 손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지렛대가 쥐어져 있다. 이 수레바퀴를 아무나 굴리게 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업 정치가에게 책임윤리를 강요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시당초 이 무거운 질곡을 견뎌내지 못할 사람이라면 그 영역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만류해야 한다.

현대 정치 제도로부터 출발한 베버의 강연은, 결국에는 청중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들이 정말로 직업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시길 바라오. 비창조적 흥분 상태를 열정으로 오해하지는 않고 있는지,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말이오.”

조직의 씁쓸한 맛에 관하여

우석훈이 쓴 ⟪조직의 재발견⟫(개마고원, 2008)을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몸담았던 ‘조직’을 되돌아봤다. 소위, ‘조직의 쓴맛’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석훈, ⟪조직의 재발견⟫ (개마고원, 2008)

나는  ‘쓴맛’까지는 아니고 ‘씁쓸한 맛’을 느낀 적은 있다. 올해 여름부터 새로이 꾸리고 있는 학회의 ‘조직화’를 피하는 이유도 그 씁쓸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조직은 그보다 오래간다. 기업도 이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어찌보면 ‘살아남기’가 조직 자체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학회를 시작한 이유도 비슷하다. 일단 조직이 있으면 내가 없더라도,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그 뜻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학회가 하나의 ‘고정점’으로서, 대학 사회에서 제 기능을 다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주변부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이 고정점을 중심으로 조직을 형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동무들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하고 있긴 하지만, ‘학회 조직화’는 이번 겨울에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 같다. 당장 내일 동계 워크샵의 주된 논제도 “어떻게 학회를 조직하고 운영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직에 몸담게 된다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 특히 대학에서 겪었던 ― 조직은 대부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딱,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럼 절이 떠나리?”하는 것이었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인데,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 것이냐?”고 되물어도 소용없다.

“아무튼 나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정도는 버텨야지. 이 정도도 못 버티면 그냥 떠나라.” 정도의 답이 돌아왔으리라. 그럼, 왜 조직에서 활동을 하는가? “들어올 때, 자기가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란다. 결국 조직 활동의 강제성은 제대로 맺지도 않은 ‘계약’(“한다고 했으면 해야지, 왜 안해?”)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가장 씁쓸한 경험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한 학생 조직에서 학술 행사를 진행할 때였다. 당시에 행사 일정 내내 조직위원들이 모여 심야회의를 했다. 당일 행사를 평가하고 내일 행사에 대해 간단히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이 시간이 생산적이었는가 하면은 절대로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는 ‘푸념’ 및 ‘윽박 지르기’가 난무했는데, 이걸 인정하고 달래가기는 커녕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왜 지금에와서 딴소리냐!”는 식의 비판이 분위기를 지배했다.

지금도 선명한 장면은 한 친구가 자신에게 과중한 업무가 부과되고 있음을 토로했고, 피로함을 하소연했음에도 “한다고 했으면 해야지.”라는 반응이 반복되었을 때이다. 내가 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일은 나에게 ‘조직화’의 스트레스로 남아있다.

지금 활동하는 학회에서도 얼른 학회장, 부학회장을 뽑고 회칙 제대로 만들어서 본격적인 조직화의 길을 걷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제안을 하는 이들의 선의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금껏 그런 식의 조직화가 남긴 건 조직 뿐이었다. ‘살아남기’ 자체가 조직의 근본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임원진을 선출하고, 체계를 쌓고, 조직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업무를 집중시키고, 잘하면 본전이며 못하면 책임을 묻자”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 학회에는 우리 학회에 걸맞는 조직 체계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고, 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 학회원이 제안했던 세미나 이외의 시간에 별도의 운영위원회의를 갖자는 의견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학회원이라면 누구나 운영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다. 운영위원회의 장은 ‘추첨’으로 추대한다.

혹시 아무도 운영위원회의에 참가하지 않으려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지만, 학회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일로를 걷는다면 운영위원회가 문제겠는가? 세미나도 제대로 돌아가질 않을 것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도다 세이지, ⟪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2006) 읽었다.

이 작가는 그림체가 유려한 것은 아니지만, 인물의 감정표현에 능숙하다. 그리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그 정점에 ⟨인생⟩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것이 당신의 인생입니다.」
“…그냥 양파 같은데요.”
「껍질 한 겹이 나이 한 살입니다.」
“…….”
“알맹이가 없는데요….”
「그런 거에요.」
“게다가”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단편적으로만 보면, 작가는 마치 인간의 삶이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도다 세이지의 작품 전반에는 ‘이 지독한 삶’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녹아있다.

다른 에피소드들도 좋지만, 나는 특히 두 번째 장―한 페이지짜리 일상―을 좋아한다.

기나긴 폭풍우를 피해 방주에 탔다.
신께서 말했다.
「대충 4, 5명이 한 조가 되거라.」
「여기는 이 4명이 한 조다.」
억지로 묶인 사람들이므로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해하려고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약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위는 역시 같은 장에 포함되어 있는 ⟨가족⟩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검둥이와 걷다⟩)에서는 이혼한 아버지가 딸에게 “가족은 그냥 저절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실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정 과잉이 아니라서 좋다. 그저 담담하게 말해도 오랜 여운으로 남을 수 있다. 화자가 흥분하면 독자는 싸늘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경기장 밖에서부터 이겨야 한다

거스 히딩크, ⟪마이웨이⟫ (2002) 읽었다.

사람 사이의 인연 만큼이나 책과의 인연도 신비롭다. 친구의 부탁으로 함께 하게 된 작업실에서 만나게 된 책, 우연히 펼쳐보고 몇 구절 읽어보다가 눈에 박혀서 기어코 빌려와서 읽었다. 아마 이런 우연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영영 없었을지도 모른다.

히딩크와 한국의 인연, 네덜란드와 한국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물론 PSV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아 좋은 성적을 거뒀던 탓에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제의 받았겠지만, 한국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도 없던 그가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에 오르게 된 인연을 단순히 인과율로 풀어내기는 힘든 일이다.

상업적 의도가 짙게 기획∙출판된 책이지만, 히딩크 감독의 솔직한 성격이 글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과 꽤 가까운 기억인 2002 월드컵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재밌게 읽었다.

요한네스 본프레레 감독이 사의를 표하고 현재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는 비어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언론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고 생각된다. 히딩크 감독 시절에도 오대영(5:0) 감독이라는 비난은 물론 그의 선수 선발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를 공격했던 언론이 있었다. 그런 언론에 대해서 당당하게 행동하면서 오히려 그를 이용해서 팀 내부 단합을 다졌던 히딩크 감독의 노력함을 생각하면 본프레레 전 감독이 너무 유약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히딩크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축구 경기는 경기장 안과 밖으로 나뉜다. 상대팀에게서, 상대팀 선수에게서, 상대팀 감독에게서 우위를 장악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로부터, 의료진으로부터, 축구협회로부터 주도권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히딩크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혈질이고 즉흥적이며 쇼맨쉽이 강한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단임할 것만 같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내보임으로서 팀의 활기를 북돋았다.

경기 운영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경기장 안에 공을 하나 더 차넣은 뒤에 퇴장당한 이야기, 터프한 플레이 스타일을 기르기 위해서 연습경기 심판을 보면서 파울을 불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스피디한 플레이를 위해 월드컵 전날 반드시 잔디의 상태를 점검한 이야기, 상대팀에 대해 정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FIFA에서 정해준 연습시간을 어겨가면서 기선을 제압하던 이야기 등이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히딩크 감독 개인의 탁월함은 물론 탄탄했던 축구협회의 후방 지원에 감탄했다. 히딩크 감독의 성과는 전적으로 물질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2002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국가적 사명을 가지고 K리그도 쉬어가며 전세기도 지원해가며 합숙 훈련도 불사하며 준비했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며 그 시절과 비슷한 수준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