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힘이 세다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 (2009) 읽었다.

이 책의 결론은, 성공한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조건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직관에 위배되지 않는다.

‘성공’이란 어디까지나 ‘사회적 성공’ ― 부, 명예, 권력 등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 ― 이기 때문에 자연히 사회문화적 조건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만 있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적인 삶을 살 수는 있겠지만, 책의 제목처럼 Outliers는 ‘운’이라 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을 타고나야 가능하다. 저자는 이 ‘운’을 만날 기회를 주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 몇 가지 재미있는 개념들이 나온다.

먼저, ‘누적적 이득’, 이는 ‘마태복음 효과’라고 불리기도 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1등을 해 본 사람이 계속 1등을 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1등과 2등이 큰 차이가 없더라도 1등에게 사회적으로 더 많은 자원과 지원이 모이게 된다.

다음으로, ‘실용 지능(practical intelligence)’. 이는 IQ 195의 천재 크리스 랭건과 맨하탄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비교하면서 나오는 개념이다. 랭건은 목장에 살며 잡문들을 쓰면서 하루를 보내고, 오펜하이머는 누구나가 아는 물리학자가 됐다. 똑똑하기로는 둘 다 똑같이 똑똑했는데, 왜 이러한 차이가 발생했는가?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데 필요한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 지능과 실용 지능은 독립적이다. 일반 지능이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면, 실용 지능은 후천적으로 습득해야 하는 지식이다.

랭건은 저학력·저소득층 가정에서 나고 자랐고, 오펜하이머는 문화적 교양이 풍부한 집안에서 자랐다. 상류층 집안의 자녀들이 ‘집중 양육’(concerted cultivation)을 받을 기회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이 집중 양육을 통해 아이는 현대사회에 적합한 ― 성공에 더욱 유리한 ― 실용 지능을 익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권력 간격 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 PDI는 특정 문화가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나타낸다. 국가와 문화권마다 PDI는 차이를 보이며, 흥미롭게도 이를 항공기 추락사고와 연결지을 수 있다.

거대한 여객기를 조종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기장과 부기장의 적절하고도 조화로운 파트너쉽이다. 기장과 부기장은 엄연히 권력관계에 있지만, 때론 이를 넘어서는 조언을 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윗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부드럽게 돌려 말하기’(즉, 완곡어법)가 일반적이다. 서구의 의사소통은 ‘화자 중심’인 반면, 동양의 의사소통은 대체로 ‘청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전세계 조종사들의 PDI를 측정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조종사들의 PDI는 높은 편이었으며 PDI 상위 5개국가와 항공기 추락사고 발생 빈도 상위 5개국가는 딱 맞아떨어졌다.

대한항공은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공용어를 영어로 바꾸었다. 이것은 문화적 차이를 무시한 행위인가? 이 조치를 단행했던 델타항공의 데이비드 그린버그는 오히려 이로써 “한국인이 스스로의 문화적 기원에 솔직해지”는 것으로 봤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데이비드 그린버그는 “문화적 유산의 힘은 강력하고 널리 퍼져 있으며 본래의 유용성이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일약한다: “문화를 무시하면 비행기가 추락한다.”

직업 정치가가 가져야 할 열정, 책임의식 그리고 균형감각

직업 정치가가 가져야 할 요건은 ‘비창조적 흥분 상태’와 구분되는 ‘객관적 태도’로서의 열정과 책임의식 그리고 이 둘을 가능케 할 균형감각이다.

직업 정치가라면 자신의 내적 기반 ― 즉, 신념 ― 에 의해 행동하되, 자신의 행동에 의한 결과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이것이 베버가 강조하는 책임윤리이다.

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가진 신념만으로 정당하며 그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직업 정치가가 베버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정치 영역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그는 그 속에 숨어있는 악마적 요소들에도 민감해야 한다.

베버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수단이 정당화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목적의 달성, 즉 자신이 실행한 바에 따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란 마지막 순간에 개인적 소회를 통해서 드러나야만 가치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념윤리가 없다면, 헌신과 열정은 생기지 않고 허무한 껍데기 속에서 공허함을 느낄 뿐이다. 고로,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는 상보관계에 있다. 가슴 깊은 곳에는 신념윤리를 간직하되, 행동에 있어서는 책임윤리를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베버는 ‘나이든 이’로서 경고한다. “10년 뒤에 어디 두고봅시다. 내 강연을 듣는 이 중에 몇이나 여전히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책임을 갖고 살고 있을지.”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정치의 영역에 뛰어들기 보다는 평범한 시민으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낫지 않겠냐는 뉘앙스다.

그럼에도, 자신이 정치에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두꺼운 널판지를 뚫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늘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현재로서 가능한 것조차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의 자세. 직업 정치가, 소명을 가진 정치가에게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해야만 하는 때는 “바로 지금!”이다.

현대 정당 발전 과정에 대한 베버의 사회학적 통찰도 빛난다. 특히 코커스(caucus), 전당대회와 같은 ‘기계’(machine)의 등장은 ‘대중적 독재자’의 출현을 초래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영혼 없는 ‘명망가 정치’가 득세한다. 이 분석은 우리의 선택을 두 가지로 좁힌다. 현대 정당체제에서 정말로 주어진 선택지는 그 둘 뿐인가? 어쨌든 한국의 경우는 전자에 더욱 가까운 것 같다.

또한 대체적으로 직업 정치가는 변호사나 저널리스트, 이익집단, 당 관료 등으로 시작하는 편이 좋다고도 덧붙인다.

변호사는 자신의 고용인을 위해 질 법한 일도 이길 수 있는 논증을 퍼부으며, 이길 수 있는 일은 더 잘 이기도록 하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직업 정치가의 중요한 자질인 연설 능력, 글쓰기 능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널리스트의 경우에는 글쓰기의 능력이라는 부분에서 주목 받으나 ‘글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고, 당 관료는 ‘정치꾼’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이익단체 소속에 대해서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현대로 올수록 저널리스트는 점점 정치에 의존해서 살기 힘들어진다는 점에서 이익단체 활동을 통해 정치 영역에 입문하는 것은 바람직한 경로라 하겠다.

이 강연에서 베버는 정치, 정당 제도로서 외적인 요건이 가지는 특성과 직업 정치가의 내적 자질을 동시에 다룬다. 정치 제도적으로 영국은 의회 정치, 독일은 관료 정치, 미국은 대중적 독재로 분류하게 되더라도, 직업 정치가의 자질을 따질 때는 ‘윤리’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좋거나 싫거나 직업 정치가의 손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릴 지렛대가 쥐어져 있다. 이 수레바퀴를 아무나 굴리게 할 수 있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직업 정치가에게 책임윤리를 강요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애시당초 이 무거운 질곡을 견뎌내지 못할 사람이라면 그 영역에 뛰어드는 것 자체를 만류해야 한다.

현대 정치 제도로부터 출발한 베버의 강연은, 결국에는 청중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들이 정말로 직업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시길 바라오. 비창조적 흥분 상태를 열정으로 오해하지는 않고 있는지,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지는 않은지 말이오.”

조직의 씁쓸한 맛에 관하여

우석훈이 쓴 ⟪조직의 재발견⟫(개마고원, 2008)을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몸담았던 ‘조직’을 되돌아봤다. 소위, ‘조직의 쓴맛’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석훈, ⟪조직의 재발견⟫ (개마고원, 2008)

나는  ‘쓴맛’까지는 아니고 ‘씁쓸한 맛’을 느낀 적은 있다. 올해 여름부터 새로이 꾸리고 있는 학회의 ‘조직화’를 피하는 이유도 그 씁쓸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조직은 그보다 오래간다. 기업도 이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어찌보면 ‘살아남기’가 조직 자체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학회를 시작한 이유도 비슷하다. 일단 조직이 있으면 내가 없더라도,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이 그 뜻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학회가 하나의 ‘고정점’으로서, 대학 사회에서 제 기능을 다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주변부적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이 고정점을 중심으로 조직을 형성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동무들을 만들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하고 있긴 하지만, ‘학회 조직화’는 이번 겨울에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 같다. 당장 내일 동계 워크샵의 주된 논제도 “어떻게 학회를 조직하고 운영할 것인가?”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조직에 몸담게 된다지만,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 특히 대학에서 겪었던 ― 조직은 대부분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딱,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럼 절이 떠나리?”하는 것이었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인데,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 것이냐?”고 되물어도 소용없다.

“아무튼 나도 좋아서 하는 것은 아니고, 이 정도는 버텨야지. 이 정도도 못 버티면 그냥 떠나라.” 정도의 답이 돌아왔으리라. 그럼, 왜 조직에서 활동을 하는가? “들어올 때, 자기가 하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란다. 결국 조직 활동의 강제성은 제대로 맺지도 않은 ‘계약’(“한다고 했으면 해야지, 왜 안해?”)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가장 씁쓸한 경험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한 학생 조직에서 학술 행사를 진행할 때였다. 당시에 행사 일정 내내 조직위원들이 모여 심야회의를 했다. 당일 행사를 평가하고 내일 행사에 대해 간단히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런데 이 시간이 생산적이었는가 하면은 절대로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는 ‘푸념’ 및 ‘윽박 지르기’가 난무했는데, 이걸 인정하고 달래가기는 커녕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왜 지금에와서 딴소리냐!”는 식의 비판이 분위기를 지배했다.

지금도 선명한 장면은 한 친구가 자신에게 과중한 업무가 부과되고 있음을 토로했고, 피로함을 하소연했음에도 “한다고 했으면 해야지.”라는 반응이 반복되었을 때이다. 내가 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 일은 나에게 ‘조직화’의 스트레스로 남아있다.

지금 활동하는 학회에서도 얼른 학회장, 부학회장을 뽑고 회칙 제대로 만들어서 본격적인 조직화의 길을 걷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제안을 하는 이들의 선의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지금껏 그런 식의 조직화가 남긴 건 조직 뿐이었다. ‘살아남기’ 자체가 조직의 근본 목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다.

“임원진을 선출하고, 체계를 쌓고, 조직을 강화하자”는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업무를 집중시키고, 잘하면 본전이며 못하면 책임을 묻자”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 학회에는 우리 학회에 걸맞는 조직 체계가 있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고, 정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한 학회원이 제안했던 세미나 이외의 시간에 별도의 운영위원회의를 갖자는 의견은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학회원이라면 누구나 운영위원회에 참가할 수 있다. 운영위원회의 장은 ‘추첨’으로 추대한다.

혹시 아무도 운영위원회의에 참가하지 않으려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있지만, 학회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일로를 걷는다면 운영위원회가 문제겠는가? 세미나도 제대로 돌아가질 않을 것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도다 세이지, ⟪몇 번이라도 좋다 이 지독한 삶이여, 다시⟫ (2006) 읽었다.

이 작가는 그림체가 유려한 것은 아니지만, 인물의 감정표현에 능숙하다. 그리고 간결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수준급이다. 그 정점에 ⟨인생⟩이라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것이 당신의 인생입니다.」
“…그냥 양파 같은데요.”
「껍질 한 겹이 나이 한 살입니다.」
“…….”
“알맹이가 없는데요….”
「그런 거에요.」
“게다가”
“눈물이 멈추질 않아요.”
「그게 바로 인생이에요.」

단편적으로만 보면, 작가는 마치 인간의 삶이란 별 볼일 없는 것이고 무의미한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도다 세이지의 작품 전반에는 ‘이 지독한 삶’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녹아있다.

다른 에피소드들도 좋지만, 나는 특히 두 번째 장―한 페이지짜리 일상―을 좋아한다.

기나긴 폭풍우를 피해 방주에 탔다.
신께서 말했다.
「대충 4, 5명이 한 조가 되거라.」
「여기는 이 4명이 한 조다.」
억지로 묶인 사람들이므로 굳이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해하려고는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약간은 행복해질 것이다.

위는 역시 같은 장에 포함되어 있는 ⟨가족⟩이다.

또 다른 에피소드(⟨검둥이와 걷다⟩)에서는 이혼한 아버지가 딸에게 “가족은 그냥 저절로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했어.”라고 실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정 과잉이 아니라서 좋다. 그저 담담하게 말해도 오랜 여운으로 남을 수 있다. 화자가 흥분하면 독자는 싸늘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경기장 밖에서부터 이겨야 한다

거스 히딩크, ⟪마이웨이⟫ (2002) 읽었다.

사람 사이의 인연 만큼이나 책과의 인연도 신비롭다. 친구의 부탁으로 함께 하게 된 작업실에서 만나게 된 책, 우연히 펼쳐보고 몇 구절 읽어보다가 눈에 박혀서 기어코 빌려와서 읽었다. 아마 이런 우연이 아니었다면 이 책을 읽을 기회는 영영 없었을지도 모른다.

히딩크와 한국의 인연, 네덜란드와 한국의 인연도 마찬가지다. 물론 PSV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을 맡아 좋은 성적을 거뒀던 탓에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제의 받았겠지만, 한국에 대해서 어떠한 관심도 없던 그가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에 오르게 된 인연을 단순히 인과율로 풀어내기는 힘든 일이다.

상업적 의도가 짙게 기획∙출판된 책이지만, 히딩크 감독의 솔직한 성격이 글을 통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과 꽤 가까운 기억인 2002 월드컵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재밌게 읽었다.

요한네스 본프레레 감독이 사의를 표하고 현재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는 비어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언론도 한 몫을 톡톡히 했다고 생각된다. 히딩크 감독 시절에도 오대영(5:0) 감독이라는 비난은 물론 그의 선수 선발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그를 공격했던 언론이 있었다. 그런 언론에 대해서 당당하게 행동하면서 오히려 그를 이용해서 팀 내부 단합을 다졌던 히딩크 감독의 노력함을 생각하면 본프레레 전 감독이 너무 유약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히딩크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축구 경기는 경기장 안과 밖으로 나뉜다. 상대팀에게서, 상대팀 선수에게서, 상대팀 감독에게서 우위를 장악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로부터, 의료진으로부터, 축구협회로부터 주도권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히딩크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다혈질이고 즉흥적이며 쇼맨쉽이 강한 히딩크 감독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단임할 것만 같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자신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내보임으로서 팀의 활기를 북돋았다.

경기 운영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 경기장 안에 공을 하나 더 차넣은 뒤에 퇴장당한 이야기, 터프한 플레이 스타일을 기르기 위해서 연습경기 심판을 보면서 파울을 불지 않은 이야기 그리고 스피디한 플레이를 위해 월드컵 전날 반드시 잔디의 상태를 점검한 이야기, 상대팀에 대해 정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FIFA에서 정해준 연습시간을 어겨가면서 기선을 제압하던 이야기 등이 기억에 남는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히딩크 감독 개인의 탁월함은 물론 탄탄했던 축구협회의 후방 지원에 감탄했다. 히딩크 감독의 성과는 전적으로 물질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2002 월드컵 16강 진출이라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국가적 사명을 가지고 K리그도 쉬어가며 전세기도 지원해가며 합숙 훈련도 불사하며 준비했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며 그 시절과 비슷한 수준의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