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2009) 읽었다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는다

책의 제목으로 쓰인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신자유주의의 핵심교리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개인은 남을 돌볼 여유가 없다. 그저 제 한 몸 간수하기도 버겁다. “타인의 고통”에 연민하는 건 사치에 가깝다. 부조리한 사회를 분노하기보다는 나의 생존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공포감에 몸을 떤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예외적 존재”가 될 수 없는 평범한 개인은 누구라도 한 방에 훅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 나오는 탈락과 몰락의 이야기가 자신과는 무관하며, 여전히 자신이 소시민적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대단한 착각”이라 꼬집는다. 이 책을 읽고도 “에이, 그래도, 설마, 나는 아니겠지!” 하며 이 비참한 현실을 외면할 수 있다면, 진정한 이 시대의 ‘강심장’이 아닐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자신은 예외적 존재라고 자신하거나, 둘 중의 하나겠다.

이 책을 읽고서야 신자유주의 세계의 공포(테러!)를 감지한 독자가 있다면, 지금까지의 둔감했던 과거를 반성함과 동시에 지금에서나마 “불편한 진실”을 일깨워준 저자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우석훈이 자신의 경제학을 ‘공포 경제학’이라 했으니, 엄기호는 ‘공포 사회학’ 정도로 부르면 어떨까? 글쎄, 저자는 그런 평가를 썩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런 평가엔 동의할 수 없다. 왜냐면, 나는 지금껏 이 저자만큼이나 이 시대의 탈락한 자들 ― 너무나도 평범한 너와 나, 에이즈감염자, 못생긴 트랜스젠더 등 ― 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내보인 이를 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절망과 비참에 대해 이토록 많은 사례를 수집하면서도, 또 예민한 후각으로 이 사회의 병폐를 지적한 숱한 저작(공포특급!)을 읽어오면서도 결론에 이르러서는 다시금 냉소주의와 패배주의를 넘어서는 희망과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국제연대활동가로서 전 세계를 누비며 놀라운 활동력을 보여준 저자가 정말 어디에나 있는(無所不在), 심지어 우리 내면에서도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맞서기 위해 ‘사유’를 요청한 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그런 저자이기에 “‘협력적 사유’, ‘사유의 운동’을 통해 보다 급진적이고 치열한 대안을 만들어 내자”라는 저자의 주장이 가벼이 들리지 않는다. “도처에 존재하는 대안은 오로지 그 대안을 실천하는 동안만 볼 수 있다.”라는 저자의 말에 귀가 솔깃하다.

신자유주의적 주체 넘어서기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선 그 정체부터 바로 알아야 한다. 만일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이념에 불과하다면 논파를 해내면 될 것이요, 일련의 정책이라면 선거에서 심판하면 될 것이요, 특정 세력이라면 떼싸움으로 맞불을 놓으면 될것이다. 만약 신자유주의가 이념, 정책, 세력 이 모두라고 한다면, 대안 논리를 고민하고 정책을 만들고 떼싸움에 나설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해묵은 물음이지만, ‘해방의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외재하는 대상물이 아니라 개인의 내면에 침투하여 자기를 확대재생산 한다. 기실 모든 ‘구조’라는 게 이런 식으로 퍼져나간다. 신자유주의와 크게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행위 양식이 축적되어 다시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을 공고히 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한다”라는 말은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되기를 거부하고, ‘다르게’ 살고자 한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 주체란 과연 누구인가?

그/녀는 무한한 자유, 그에 따르는 무한한 책임을 동시에 가진 개인이다. 무한경쟁에 내몰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신을 보다 극심한 경쟁으로 내몰지 않고서는 도무지 불안해서 견디지 못하는 존재이다.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과 ‘노동의 유연화’라는 시대적 조류에 능란하게 올라타는 ‘우아한 유목민’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피난민이나 유랑민에 가까운 불안정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들이다. ‘환금성(換金性)’을 내면화하여, 팔 수 있다면 육체도 영혼도 모두 시장에 내놓기를 마다하지 않는, 또 그러기를 요구받는 자들이다.

그들은 여가를 반납하고, 전방위적 자기계발·자기경영에 힘쓰는, ‘자영업자’이기를 요구받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돌봐주던 친절했던 복지국가는 돌연 변심하여 이제는 조금만 기대려고 해도 아니 이 양반이 쿨하지 못하게 왜 이러냐면서 탈락한 건 니 책임이니 곱게 죽으시라고 그대로 방치한다. 내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며 저항이라도 할라치면 가차 없이 단죄한다. 강경진압에도 다 이유는 있다. “시민 여러분의 안전”을 위해서다. 기업의 이윤 보장을 위해 그나마 쳐져있던 엉성한 그물인 주권, 시민권도 다 걷어가는 판에 참 핑계도 좋다. 이제 정말 까딱 잘못해서 미끄덩하면 곧장 나락이다. 공포가 일상이다.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신자유주의적 주체이다. 신자유주의의 탈락후보자들이며,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확대재생산하고 공고화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대안적 주체’로 자신들을 바꾸어낼 가능성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어쨌거나 대안적 사유도, 실천도 모두 ‘주체’가 할 일이니까 말이다.

우석훈은 근간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를 통해 “20대야, 제발 좀 쫄지마라.”라고 했지만, 되돌려 줄 말은 “안 쪼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이다. 그렇다고 손만 빨며 기다릴 순 없는 노릇이다. 원래가 뾰족한 수는 없다. “어차피 뾰족한 수는 없다”라는 인식의 공유,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활로는 그때부터 열릴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는 특히 ‘소유할 자유’이다. 이 자유의 극단적인 확장이 신자유주의라는 운동의 핵심을 차지한다. 전통적으로 정치학에서는 ‘자유’의 극단을 중화하기 위한 해법으로 ‘공동체’라는 대립물을 소환하곤 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덕목, 가치가 균형적으로 배치되는 구도이다.

신자유주의 때문에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나 덕목이 일거에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우정과 환대, 돌봄과 치유의 공동체가 필요하다. 아주 작은 규모의 형태로라도 말이다. 이런 식으로 소박하지만 ‘나’를 ‘나’로서 바로 세울 수 있는 관계의 공간을 넓혀가야 한다. 조금씩 숨통을 틔워야 한다. 연대의 출발점을 찍어야 한다.

책의 사례에서 보듯, 현재 한국에서 ‘예외가 되기 위한 노력’은 이례적으로 획일적이라는 점에도 주목해본다. 다들 불안정하기에 더욱 확실한 것만 찾고 있다. 서울, 특히 강남, 대기업, 영어, 성형 등이다.

대안의 공간은 ‘예외의 외부, 예외의 예외’에서 열릴 수도 있다. 서울이 아닌 자기가 나고 자란 지역공동체를 가꾸려는 노력, 중소기업이나 사회적 기업 또는 생협을 통해 경제활동을 시작하려는 시도 같은 것들이다.

말로는 뻔해 보이지만, 결코 뻔한 얘기가 아니다. 게다가 이게 대안의 전부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다시 한 번, 뾰족한 수는 어디에도 없음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사유의 운동’을 시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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