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요즘, 정말 흔치 않은 몰입 경험을 준 소설이다. 읽는 내내 조중걸의 ⟪키치, 우리들의 행복한 세계⟫가 생각났다고 하면 그저 우연일까. 분명히 책 날개에 “자전적 요소도 있다”라고 쓰여있었기에, 나는 이 소설이 어쩌면 소설이 아닐지도 모른다, 라고 추측했다. 마치 소설이 곧 사실인양 생각하며 읽었다. 어쩌면 사실이 또한 소설이기 때문이리라.

플롯이 새롭지는 않다. 간추리자면, “운명적 대상을 만나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으나 난관에 부딪혀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났다”는 정도이다. 배경은 색다르다. 캐나다 곳곳을 주무대로 한국과 그리스, 우크라이나 등의 나라도 잠깐씩 나온다. 플라잉 피시나 카누 여행, 로키산맥에서의 야영에 대한 서술은 경험하지 않고는 이렇게까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중심화자이자 주인공인 조지 역시 작가 자신이며, 특유의 간결한 필체는 작가 자신의 스타일일 것이다.

정말 재밌게 읽었기에 이 작가의 차기작이, 만약 출간된다면 이 작품만큼 성공적이긴 힘들 것이란 예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아가는 동안, 그런 아쉬움이 들어 다음 페이지로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게 정말 소설이 맞나, 소설이 아니라면 왜 아니고, 소설이 맞다면 왜 맞는가, 그런 메타-물음을 품게 됐다.

우리는 누구나 조지가 되어 ‘나스타샤’를 만나길 희망한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지며 결국 사랑의 대상이자 가능조건인 나스타샤마저 떠나보낼 정도의 사랑! 그런 사랑을 하길 희망한다. 다만, 그 사랑에는 항상 보리스와 아니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 모두 우리 자신인 조지에게는 부담스런 존재이다. 정작 나스타샤의 곁에 있으면서도 언젠가 이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야 함을 잊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떳떳함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 병든 행복을 마다하고 건강한 불행을 안으려는 적극적인 태도. 그러나 그것이 사랑에도 정녕 필요할까? 나는 나의 나스타샤에게, 그녀의 보리스와 아니카에게, 각기 그녀의 절망과 희망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독자는 조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나스타샤가 행한 ‘자유’는 충격적이다. 보리스는 묻고, 아니카만 살리는 그런 선택이 가능할 것인가?

분명한 건, 조지는 나스타샤를 만남으로써 나스타샤는 조지를 만남으로써 사랑을 했다. 나도 안다. 이런 서술은 “나는 살았다!”라는 외침 밖에 더 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삶의 전부이다. 그러니 특별히 슬퍼할 일도 가슴 아파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전부이다.

의지가 중요한 것이지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바다를 건너 달린다 해도 머리 위의 하늘을 바꿀 뿐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더 중요하다.
– 17쪽

나이 든 사람들의 편안함은 포기와 낙담의 대가이다. 생명의 설렘을 모두 포기한 채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궁극적인 지향점도 없다는 근본적 절망에서 나오는 편안함. 그러나 젊음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 그들의 설렘을 건다. 부유하고 망설이고 떨고 고뇌한다. 어느 쪽이 행복인가.
– 20쪽

문화 구조물의 출발점은 실천적 계기이다. 그것들은 생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생존의 양식은 바뀌는 것이고 거기에 맞추어 우리 문화 구조물의 형식도 서서히 변해 나간다.
– 26쪽

본래 학문 간의 연계란 자기 전공에서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뭔가 할 일을 찾아 헤맬 때 생겨나게 된다. 뛰어난 사람은 전공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 38쪽

만약 스스로의 지적 성장과 교양의 습득이 삶의 목적이라면 이것은 생산적 노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유한 계급의 이야기이다. (…) 순수 학문은 기생적 문화이다. 사회가 충분한 생산성을 가져야만이 문화들이 기생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이 순수한 사람들을 모두 감당할 수 없다. 생산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전공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순수 학문을 하고 싶다면 먼저 돈이 많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파멸적 고통을 겪어 나갈 자신이 있는지, 또 자신의 재능은 그 고통에 상응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 39쪽

학문이 지니는 매혹적 감동과 가치는 일단 학위라는 틀에 갇히면 화석화되고 무미건조해진다. (…) 만약 총명하고 심오하다면 이 같은 연구의 무의미와 무가치를 견뎌내지 못한다. (…) 천재들이 포기하는 시점에서 둔재들은 전지해간다. 무의미를 견디는 데에 있어서는 아둔한 사람들이 유리하다. 교수들은 둔재의 경연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본래 아카데미의 담 안에 학문은 없다. 거기에는 강의실, 교수, 연구실, 식당, 도서관 등 실로 많은 것이 있다. 그러나 학문은 없다.
– 40쪽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침묵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이 막막한 무기물의 우주에서, 영혼과 마음은 기적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것은 소통과 이해와 공감에 의해 그 존재 의의를 지탱해 나간다. 기적의 존재 의의는 서로 간의 사랑이다.
– 42쪽

천재는 우리의 재화, 아마도 인류의 가장 큰 재화가 아닐까. 그러나 그는 찬사를 받는 천재여서는 안 된다. 인식되지 않은 채로, 주위의 어둠에 의해 가려진 채로, 그리고 유산에 의하여만 그 가치가 알려지는 천재여야 한다. 찬사와 환호는 천재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찬사에 휩싸인 천재는 더 이상 천재가 아니다. 그의 천재성은 이미 빛을 발했고, 이제 그 결과를 누리는 평범한 사람이 된다. (…) 천재는 그의 빛나는 역량 자체가 이미 보상이다. 황금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 지상의 찬사를 구해서는 안 된다.
– 43쪽

왜 우리 사이에는 야유와 냉소와 침묵과 존중만이 있어야 하는가. 사랑과 이해와 우정과 농담이 있으면 왜 안 되는가. 왜 스스럼없는 사이가 될 수 없는가.
– 48쪽

인간의 경우 생식은 육체적 죽음은 아닐지라도 정신적 죽음을 의미한다.
– 80쪽

호모 사피엔스는 어설픈 신이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가 신이 아니라는 여러 증거들을 감추고자 했다. 이것이 터부이다. 결국 모든 터부는 우리의 동물적 기원을 암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과 성(性)은 감추어야 하는 어떤 것이 된다.
– 95쪽

성에 대한 결벽증을 가진 여성은 사실은 이러한 야만적 오만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젊은 처녀의 결벽증은 오만에 초심자의 환상을 더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환상은 슬프고 우습다. 이것은 오만이지 순결이 아니다.
– 96쪽

결국 행복은 사람의 문제였다. 내 관심을 요구하고 내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행복의 첫 번째 요건이었다.
– 101쪽

실패에 의해 한순간에 몰락한 사람은 재기할 수 있고 종종 재기한다. 그러나 서서히 몰락해가는 사람은 재기 불능이다. 스스로의 무기력과 포기에 의해 하루하루를 실패해 나감에 따라 한순간에 실패한 사람보다 수십 배 여러 번 몰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112쪽

이기심, 어리석음, 허영, 감상, 고집, 불안, 공포 등등. 어떠한 종류의 사랑이건 지혜로움이 없다면 차라리 사랑이 없는 것이 낫다. 그것은 사랑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이기심과 탐욕과 소유욕과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 113쪽

부에 대한 경멸은 젊음의 특권이다. 젊은 시절부터 자기 삶 전부를 돈에 거는 사람들은 젊음의 특권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 돈을 경멸하는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돈을 경멸한다 해도 돈이 우리를 존중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돈을 경멸하면 이번에는 돈이 우리를 경멸한다. 우리 아닌 다른 모든 사람에게서 돈은 존경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127쪽

어떤 원칙도 어떤 선험성도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 언론만이 촌스럽게 유치한 단어들을 휘둘러대고 있었다. 가식적이고 촌스럽고 선동적이라는 점에 있어서 언론은 나라를 구분하지 않는다. 거기에다 유식하고 세련되어 보이려는 허위의식까지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모든 언론이 똑같다.
– 138쪽

이슬람 국가들은 중세적 세계를 원하고 있다. 그들은 신이 죽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
– 138쪽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질시를 어느 정도 즐기는 반면에 부자 조상을 둔 사람들은 그것을 태연하게 이겨내지 못한다. 그들은 부가 주는 안락함에 다른 사람의 사랑까지 더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그들이 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첫 번째 이유이다.
– 142쪽

이것이 진화이리라. 어떤 개체인가가 물속 세상을 지겨워하며 탈출을 꿈꾸었다. 대기(大氣)를 원한다. 나무와 숲과 창공으로 이끌린다. 모두가 몰락한다. 그러나 몇몇 개체가 성공한다. 이제 공기만으로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종(種)의 탄생은 이러한 방랑과 유랑의 충동 덕분이다. 핏속에서 힘차게 뛰는 생명의 분출이 진화의 단서이다. 인간이라는 종은 무책임한 개체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들이 최초의 에렉투스(erectus)이다.
– 158쪽

인간 존엄성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는 친구와 가족이다. 친구가 있는 노숙자의 삶은 버림받은 부자의 삶보다 훨씬 존엄하다. 부자는 자기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 195쪽

무지는 지식의 결여는 아니다. 무지는 좀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무지는 기질과 성향과 태도의 문제이다. 성향과 기질과 세계관에 있어서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실천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노력이나 지성이나 예술을 경멸하고 비웃는 오만함이 본질적 무지이다.
– 196쪽

나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숙고가 나를 망쳐왔다. 행동해야 한다.
– 221쪽

죽음이 대가라면 그렇게 비싼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덜 소중하지 않았을 수많은 때 이른 젊은 죽음들이 우리 역사에 널려 있고 우리 주변에 널려 있지 않은가. 내가 죽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대수인가. 삶이 죽음보다 더 소중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안다면 설명해달라.
– 235쪽

삶은 무의미였다. 누군가가 좀 더 일찍 삶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말해주었어야 했다. 나는 얼마나 많이 나의 과거의 교수들을 원마했는지 모른다. 왜 그들은 내게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는가. 내가 얼마나 절박하게 구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그들 세계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기만적 만족을 누렸는가. 나는 구원의 호소 없이 살아왔고 위안과 공감 없이 살아왔다. (…) 나를 힘들게 한 것은 환상과 희망과 무지였다. 나는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는 헛된 시도 가운데 불행했다. 누군가 가르쳐주었어야 했다. 삶이란 살아가고 있는 너 자신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구원은 없고 구원을 추구하는 너만 있을 뿐이라고. 죽음은 없고 죽어가는 네가 있을 뿐이라고.
– 265쪽

언제나 신참자들이 문제이다. 그들은 개종자의 정열을 가지고는 그들의 우월성은 과시한다.
– 294쪽

음식은 문화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화인 건 음식이 생활양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음식에 대한 태도에는 문화적 자신감, 문화적 열등감, 선진국에 대한 선망, 후진국에 대한 멸시 등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열등한 음식이란 없다. 단지 가난한 국가의 음식만이 있을 뿐이다. 경제적 가난과 열등한 음식은 관련이 없다.
– 312쪽

이 세상에 감춰져야 하는 것이 몇 개 있다면 무식과 부가 거기에 속한다. 특히 부는 되도록 감춰지는 것이 좋다. 돈은 필요의 문제이지 과시의 문제는 아니다. 돈을 허영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 삼을 때 그것은 악마의 얼굴을 한다. 그리고 돈에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악마를 불러들이는 사람이다.
– 329쪽

가치 있는 여성이라면 미의 전성기는 30대에 온다. 아름다움은 여러 차원에서 존재한다. 어떤 여성인가가 지성과 교양에 가치를 부여하고 스스로를 그 가치에 맞추어 훈련한다면 그녀는 초췌하고 두드러지지 않은 20대를 보내게 된다. 무언가를 알기엔 20대는 아직 어린 나이이다. 그녀에게 삶과 세상은 당연하고 단순한 어떤 것이기보다는 두렵고 낯선 혼란이다.
– 335쪽

감성적인 민족이 어느 날 지성적이 되고자 했을 때, 메마른 지성은 감성에 의해 화약을 공급받는 새로운 지성의 폭발을 견뎌낼 수 없다. 서구의 지성은 메말라가고 있다. 그들의 잠재력은 탕진되었다. 신은 이제 누구에게 고통을 줄지 모른다. (…) 정열이 중요하다. 그 정열 위에 지성이 실릴 때 그것처럼 파괴력 있는 것도 없다.
– 354쪽

고마움과 경의를 표해야 한다. 문명은 포획물에 경의를 표할 줄 모른다. 문명은 오만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적수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나는 뱃전에 몸을 숙이고 꼬리를 잡아 올리며 감탄과 경의를 표한다.
– 434쪽

언어는 이를테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작별 인사인 셈이다. 여자는 자연이다. 여자는 남자에 이끌려 문명에 속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아이의 생존을 위해 진화한 여자는 직관과 본능을 잃지 않고 있다. 아이의 생존은 여자의 직관에 의존한다. 아이는 아직 동물이기 때문이다.
– 435쪽

아이들의 권리는 보호받고 자라는 데보다 모범을 보고 자라는 데 있다. 엄마들은 아이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는 것보다 스스로가 지혜롭고 자애롭고 의연한 사람이 되는 것에 의해 아이들을 훨씬 잘 키울 수 있다. 아이의 문제는 결국 엄마 스스로에게 수렴된다. 아이에게 잘해주는 것보다 스스로에게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 470쪽

강인하고 악질적인 인간들이 사회에 적극적인 해악을 끼치는 것 이상으로 유약하고 낭만적인 사람들이 사회에 소극적인 해악을 끼친다.
– 493쪽

어떤 외연적 아름다움도 내면적 지혜와 용기를 보상할 수는 없다.
– 493쪽

어떤 여자들은 자신들의 무지조차도 여성에게 합당한 존중심으로 대접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 495쪽

몸을 파는 여자만 창녀가 아니다. 성적 매력에 대한 보상이 물질적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창녀다. 어떤 여성들은 여성적 매력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스스로가 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육체적·여성적 매력에 대한 남성들의 시각과 본능에만 스스로를 맞추려는 여자들이 있다. 이러한 여성들은 그들이 어떤 고상함에 싸여 살아간다 해도 본질적으로 몸을 팔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 고급 창녀들은 혼인과 관련해 법률적 구속을 원한다. 자신들의 육체에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한때 화사하게 피어났던 스스로의 육체애 대한 보상을 평생을 통해 청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 496쪽

판매에 지나지 않는 자기 행위에 사랑이나 학문이나 자선 따위의 어마어마한 수식어를 붙여야 만족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치보다 비싸게 팔려는 목적이다. 부도덕은 여기에 있다. 이것은 사기일 뿐만 아니라 자기기만이다.
– 497쪽

유물론자들은, 만약 그들이 진정한 유물론자라면 고상하고 지적이고 솔직한 사람들이다. 이념과 존재의 근원을 물질에 두는 데에 있어서 그들의 세계관은 물질주의자들의 세계관과 같다. 차이는, 유물론자들은 스스로의 물질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문화 구조물의 물적 근거를 통찰하는 데 반해 물질주의자들은 물질 그 자체에 머무르기 위해 모든 삶을 물질로 환원시켜 버린다는 데 있다.
– 525쪽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나는 어리석었다. 단지 내게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없었을 뿐이다. 영혼으로나마 이루고자 했던 절실한 소망이 없었다. 육체는 죽어간다 해도 무엇인가가 남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나는 몰랐었다. 모든 것을 영원의 빛에 비추고자 하는 그 호소에 대해 나는 몰랐다.
– 579쪽

Posted by:박세희 (Park Sehee)

@pase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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