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2월 9일에 대구에서 나고 자랐다. 위로는 누이가 하나 있다. 애 둘 낳은 몸으로 차가운 시내로 빨래 나가는 어머니가 보기 안쓰러워 하는 수 없이 세탁기를 샀다, 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으나 어머니 때문이 아니라 둘째가 아들인 것이 기뻤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 사실 때문에 아버지는 아직도 누나에게 마음의 짐 같은 걸 갖고 계신다. 누나는 이미 아버지를 용서했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세희(世熙)’라는 이름은 백부께서 지어주셨다. 그 뜻이 “세상에서 빛나라”인지 “세상을 빛내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 둘째 사촌 누나에게 갈 이름이었는데, 사촌 ‘형’이 아니라 ‘누나’가 나왔다는 이유로 그 이름이 나에게 왔다. 본디 남자 이름이었단 얘기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아니 부러운 법인데, 당시 우리 집안에는 어설프게나마 남존여비 관념 같은 것이 남아있었던 셈이다. 아버지께서는 ‘관희’라고 짓고 싶으셨다고 한다. 이름에 ‘벼슬 관(官)’ 자(字)를 넣으려 하셨다니, 어째 좀 노골적이라 낯뜨겁다.

어린 시절 살던 대구시 수성구 범물동은 촌스러운 동네, 그야말로 촌구석이어서 이웃끼리 정답고 자연과도 가까운 동네였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다른 동네로 이사하고 나서 범물동을 가로질러 흐르던 시내가 덮이고 아스팔트 큰 길이 났으며 고층 아파트가 병풍 마냥 늘어서게 됐다. 명절 때마다 한 번씩 옛 이웃을 만나러 가지만, 옛 느낌은 거의 없다.

사촌형제들도 죄다 누나들 뿐이었고 동네에서 어울렸던 또래 중에도 남자애라곤 거의 없었던 터라, 학교에 입학해서 사내끼리만 놀 때는 그리 잘 적응하진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싸나이’ 냄새 물씬 풍기는 마초적인 문화는 어째 좀 꺼려지고 그렇다.

내가 어렴풋이 기억도 못 할 정도로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삶의 중심에 가족을 두게 된, 자녀 교육에 열성적으로 관심을 두게 된, ‘전환적 사건’을 겪으셨다고 한다. 나는 그 덕에 돈이 들어가는 놀거리와는 적잖이 거리를 두게 된 대신, 학업에 필요한 것은 부족함이 없이 누리며 살았다. 전반적으로 그리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일례로 아버지의 컴퓨터 조기교육 정책에 힘입은 나는 PC통신과 인터넷을 일찍부터 접했다. 그 덕분에 재미난 경험들을 했다. 여러 대회에 나가 수상도 했고, 아무튼 평범한 학창시절은 아니었다. 현재까지도 소중하게 이어지고 있는 인연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 때문에 나이에 걸맞지 않게 머리만 일찍 굵어졌던 것도 같고, 시덥잖은 헛바람이 들기도 했다.

주말 등산 후 대중목욕탕에서 내 몸 구석구석을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씻겨주시던 아버지. 그때마다 아버지께서는 꼭 잊지 않고 “우리 집 가훈은 수신(修身)”이라며 너스레를 놓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내 방에 놓을 책상도 직접 만들어주셨다. 직접 합판을 짜오셔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아파트 복도에서 뚝딱 만들어내셨다. 지금도 아버지는 DIY를 선호하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야간자율학습 전원 필참’을 방침으로 삼으셨던 담임 선생님을 설득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교무실에 방문하셨다. 내가 야간자율학습을 빠지고 미술학원에 다니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내심 나의 ‘미대 진학’을 전혀 바라지 않으셨음(오죽했으면 자식 이름을 ‘官熙’로…)에도 ‘자식이 하고자 하는 바’를 믿고 선뜻 나서주셔서 참으로 감사했다. 쑥스럽게도 그 일이 있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미대 진학은 포기했다.

참 운이 좋았던 덕에, ‘명문사학’이라 자부하는 학교에 진학했다. 기쁨도 잠시, 만만찮은 등록금 때문에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대학 초년생 시절에는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겉돌았다. 처음 해보는 타향살이가 사무치도록 외로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속도 많이 앓았다. 그래도 반 선배, 동아리 선배들이 챙겨준 덕에 터무니없이 망가지진 않았다. 고전 세미나도 하고 농활도 다녀오고 그랬다. 준 것은 없고 받은 것만 많았다.

정치학 공부에는 꽤 몰입했다. 몸으로 하는 정치 연습도 꽤 재밌었다. 연정(延政)이 나를 키웠고, 나는 연정에서 꿈을 키웠다. 이신행 교수님, 장동진 교수님, 김명섭 교수님, 김성호 교수님 그리고 김용호 교수님께 특히 많은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다. 홍성찬 교수님, 홍훈 교수님, 조한혜정 교수님께도 많이 배웠다. 스승은 물론 총명한 동무들로부터도 많이 배웠다. 본디는 외교와 국제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나 차차 내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게 될 ‘공동체’를 가꿔가는 과업에 사명을 갖게 됐다.

입관(立觀), 입론(立論)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토론은 곧 전쟁”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각을 세웠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상대를 몰아붙였다. 그래 봤자 끝에 가서는 늘 ‘차이’만 확인할 뿐이었다. 나는 원하는 바를 얻지도 못한 채 다른 이의 마음에 생채기만 냈다. 그렇게 모나고 삐딱한 나를 떠나지 않고 꿋꿋이 곁에 머물러 준 친우들이 있어, 지금은 조금 나아진 편이다. 마음 속의 동지(同志)들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숱한 시행착오와 실패들을 뒤로 한 채, 그 속에서 일궈낸 값진 작은 승리들은 가슴에 품고,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그다지 극적일 것 없는 이 짧은 삶 속에서, 나는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보이지 않게 면면히 이어 온 어떠한 ‘뜻’을 읽어낸다. 그 뜻은 내게 ‘나’ 아닌 ‘남’을 위해 ‘일신의 영달’이 아닌 ‘사회의 번영’을 위해 살라고 준엄하게 꾸짖는다. 지금의 나는 그 ‘뜻’을 보다 선명하게 윤색하고 현실적으로 구체화할 방법을 모색한다. 그렇게 나는 이 허무의 세상에서 ‘존재 이유’를 찾는다. 존재의 알리바이를 만든다. 과거와 미래의 중간역을 자임한다.

이 시간에도 ‘박세희 이야기’는 쓰여지고 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과 응원이 없이는 미완성일 운명으로, 말이다.

Posted by:박세희 (Park Sehee)

@pase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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