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여름. 백숙이 되기 위해서 찜통 속에 들어앉은 닭이 생각날 정도로 덥고 습했던 그 여름의 한가운데, 나는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와 몸에 잘 맞지도 않은 책상을 허리에 끼곤 손 때가 묻은 문제집을 펼쳤다.

그나마 여름에는 낮보다 밤이 덜 졸립고 선선해서 공부하기 편했던 기억이 있다. 교실 TV에서는 EBS 수능특강이 방영되고 있었고 지루한 문제풀이 간간히 넣어주는 휴식 시간에 나온 한 아나운서가 이 책을 추천했다.

초등학생, 중학생 권장도서 목록 따위를 믿지는 않지만 한 번 읽어서 그 감흥을 느낄 수 없다면 시간의 간격을 두고 다시 들춰보는 것도 책읽기의 요령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것을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좀 위험하긴 하지만, 한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이 책을 집어들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얼마나 더 있겠다는 것인가? 왜 나와 함께 가지 않나? 저 멀리 코카서스에, 위험에 처한 수천만 동포가 있는데? 함께 가서 구해주자…….”

 

그러다, 자신의 계획이 한심하게 여겨졌는지 웃으면서 덧붙였다.

 

“……구해주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자네는 이렇게 설교하지 않았는가,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라고……. 그럼 구해야지. 자네는 설교에만 소질이 있는 건가. 왜 나랑 같이 가지 않는 건가?”

 

(…)

 

“안녕Au revoir, 이 책벌레야!”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다는 게 창피한 노릇인 줄은 그 친구도 알고 있었다.

평생 책으로만 세계를 이해하고 또 구원하려고 노력했던 ‘나’가 친구를 떠나보낸 항구에서 ‘조르바’를 만나 크레타 섬으로 간다. 그렇게 시작되는 조르바와의 동거는 ‘나’의 삶을 통째로 뒤흔든다. ‘나’는 조르바를 경외하며, 그에게서 느껴지는 인간 본연(本然)의 열정이나 거침없는 욕망에 감탄한다. ‘나’가 책을 통해서 끊임없이 세계를 탐구하려고 노력했던 반면, 조르바는 오랜 세월이 가르쳐준 경험의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다.

그 어떤 끈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추구하는 조르바를 보며, ‘나’는 흡사 이 인간(조르바)를 자신의 사유 속에서만 존재하던 붓다와 오버랩 시킨다. 모든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며, 자신의 몰락이 곧 세계의 몰락이라 말하는 조르바. 신 조차 엿 먹이는 그의 자유분방함과 경계가 없는 열린 마음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진정성(authenticity)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Posted by:박세희 (Park Sehee)

@pase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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