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생일에 연세지 친구들로부터 선물 받아서 읽었다. (생일 선물로 ‘인간 실격’을 받다니.) 민음사판 표지는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자화상⟩이다.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줄곧 이 그림이 떠올랐다.

1인칭 시점의 소설을 읽으면 나는 종종 작가와 화자를 동일시 하곤 한다. ‘자전적 소설’이 아닌 경우에도 말이다. 더군다나 이 작품처럼 배경이나 인물 설정이 전혀 허구적이지 않을 때는 그냥 이 책의 주인공이 다자이 오사무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읽는 것이다. 이런 독법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나, 어쨌든 이 책은 그렇게 읽었음을 밝힌다.

이 소설을 쓴 다자이 오사무는 다섯 번째의 자살 기도에서 사망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자체를 괴로워하는 자에게는 자살이야말로 구원의 수단인 것일까. 아니면 자살조차도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지병이 있던 요조는 결국 병원으로 옮겨지는데 이 병원이 정신병원임을 알고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된다. 주윗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광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에도, 이에 더해 요조가 보기에도 내가 보기에도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은 ‘인간’들이 요조를 비정상으로 규정해버린 것에 대해서도, 이 모두가 요조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위궤양으로 죽고, 시골에서 요양하게 된 요조. 하루는 식모가 잘못 사온 헤노모틴을 먹고 설사를 하게 된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p.134)

이 책의 독자는 누구나 정작 ‘인간 실격’인 자들은 넙치나 호리키 따위가 아닌가 싶을 것이다. 요조의 사진과 수기를 건네주면서 한 남자에게 마담은 말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p.138)

온갖 익살로 남의 눈을 속이며 ‘나는 인간 세상에 잘 적응해서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적응해서 살 것’이라고 말하는 요조는 나의 모습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호리키와 ‘비극명사’, ‘희극명사’ 맞추기 놀이, 반의어 찾기 놀이 등을 하면서 ‘죄(罪)’의 반의어를 찾으려 고심하던 요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생각한다. 요조는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었다. ‘자학적 반성’은 ‘자기 파괴’와 맞닿아있는 것일까.

짧지만 도저히 한 번에 정리할 수 없는 이 소설은 인간의 우발적인 물음을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충분히 철학적이다.

Posted by:박세희 (Park Sehee)

성장의 기쁨, 나눔의 즐거움. hubby, daddy of two sons, lawyer, ever learner.

Leave a Reply

Fill in your details below or click an icon to log in:

WordPress.com Log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WordPress.com account. Log Out /  Change )

Google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Google account. Log Out /  Change )

Twitter picture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Twitter account. Log Out /  Change )

Facebook photo

You are commenting using your Facebook account. Log Out /  Change )

Connecting to %s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